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버르토크 벨러 (문단 편집) === 원숙기 === 1908년은 그의 음악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시점에 나온 14개의 바가텔(Sz. 38)이나 현악 4중주 1번(Sz. 40) 등의 작품에서 바르톡은 이제까지의 후기 낭만주의적 성향과 완전히 결별하고 민속음악의 각종 어법을 소재로 좀더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작법을 추구하게 되었다. 관현악 쪽에서도 점차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어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907년에는 지글러 가문의 두 딸을 제자로 받아들였는데 2년 후 동생인 마르타 치글러(Márta Ziegler)와 결혼하여[* 결혼당시 버르토크는 28세, 마르타는 16세로 띠동갑이었다. 첫번째 부인 마르타도 버르토크의 제자였지만 후처인 디타도 그의 제자였고 모두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 어린 신부감 찾으려고 제자를 받았나봐 -- 사실 예전에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으나, 차였다.]1910년에 버르토크 벨러 주니어를 낳았다. 한편 버르토크는 1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을 때까지 작곡가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의 음악은 당시에는 너무 급진적었으며 헝가리 민요의 선법체계를 응용한 그의 작법은 청중이나 동료 음악가들을 이해시키지 못했다. 마르타와 결혼 직후 프랑스 파리를 방문해서 부조니의 주선으로 뱅상 댕디나 이시도르 필립 등 당시 프랑스의 유력음악인들을 만났으나 이들은 버르토크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모국인 헝가리에서도 크게 환영받지는 못했는데 1911년에는 아내 마르타에게 헌정한 버르토크의 유일한 오페라 푸른 수염 영주님의 성(Blubeard's Castle)을 헝가리 고등예술 협회(Hungarian Fine Arts Commission) 주최의 콩쿠르에 출품했지만 연주할 수 없다며 출품을 거부당했다. 콩쿠르의 일이 있고 나서 그는 작곡을 중단하고 항의의 차원에서 모든 형태의 공적인 음악활동에서 물러났다. 이 시기 그는 음악학자로서 민요수집에 열중하였고 민속음악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다수의 글을 언론에 기고하였다. 또 중앙 유럽과 발칸 반도, 터키 일대의 민요를 수집하여 정리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민요 수집이 힘들게 되자 그는 다시 작곡을 시작했다. 1차대전 중 작곡된 발레곡 허수아비 왕자(Wooden Prince)가 1917년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뒤늦게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공교롭게 허수아비 왕자의 대본도 전술한 벌라지 벨러가 작성했는데, 이 발레곡이 큰 성공을 거두고 나서야 이제까지 연주되지 못했던 푸른 수염 영주님의 성도 1918년 마침내 초연이 이루어진다.[* 벌라지는 1차대전 직후 헝가리를 장악한 공산주의 정권에 투신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나 공산주의 정권이 급속하게 몰락하는 바람에 해외로 망명하게 되고, 이후 바르톡과도 더 이상 인연을 맺지 못했다.] 같은 시기에 피아노 모음곡(op. 14, sz 62)과 현악 4중주 2번(sz 70) 같은 버르토크 초기를 대표할만한 작품들이 작곡되었다. 1차 대전은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배로 끝이 났고 헝가리는 정치적, 경제적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버르토크 가족의 경제상황도 계속 악화된데다 1919년 6월에는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목숨이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른다.[* 버르토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서 주기적으로 큰 병을 앓았으며 이런 증상은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큰 병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지내야 했으며 학자들은 이런 점들이 바르톡이 평생 내성적이고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을 갖게 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바르토크가 얼마나 주변 사람과 교류가 없었던지, 바르토크와 지글러의 결혼은 그의 어머니조차 결혼식 당일(!) 알게 되었으며, 코다이와 도흐나니 같은 친구들은 한참 후에야 알고 뒤늦게 축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정치적 혼란을 피해 여기저기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계속 작곡을 하였는데, 허수아비 왕자에 이어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의 영향을 받은 또다른 발레곡 중국의 이상한 관리(The Miraculous Mandarin)와 두 개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썼다. 두 바이올린 소나타는 그의 작품 중 화성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가장 난해하며 당시의 통상적인 음악문법에서 가장 멀어져 있다.[* 버르토크는 이 작품 이후 한동안 별다른 작품을 내놓지 못하다 1926년 들어 다시금 활동을 시작하는데, 이는 그가 그동안 추구해온 12음 기법과 민속음악의 융합을 포기한 것이며, 그 이후 버르토크의 모든 작품들은 표현주의를 멀리하며 확고한 조성 위에 자리잡게 된다.] ||<:>[[파일:external/10f9b7a3d0a080372889f179035fa947fe8efb89fa6a127ab9356f8805bfc04f.jpg|width=300]]|| || 버르토크와 22살 연하의 두번째 아내 디타 || 1923년 버르토크는 마르타와 이혼하고 그에게 피아노를 배운 디타 파스토리(Ditta Pásztory, 1903-1982)와 재혼하여[* 이혼의 원인은 바르톡의 불륜. 첫 번째 아내도 12살 연하였는데, 결혼 당시 디타는 겨우 20살로 바르톡보다 무려 22살이나 연하였다! -- 로리 취향의 바르톡 -- 다만 두번째 아내와는 특별한 잡음 없이 평생 같이 살았다.] 다음해인 1924년에 두 번째 아들 페테르(Péter)를 낳았다. 버르토크는 이후 한동안 작곡에 손대지 않다가 아들 페테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위한 여섯 권 분량의 피아노 연습곡 《미크로코스모스》(1926~37)를 썼다. 이후에 쓴 현악 사중주 제6번(1939)는 그가 유럽에서 쓴 마지막 곡이 된다.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5~6년간은 작곡가 버르토크의 진정한 황금기로서 이 시기에 현악4중주 6번과 미크로코스모스 외에도 현악4중주 5번(1934), 현과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1936), 두 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1937, 1940년에 협주곡 버전으로 개작), 바이올린 협주곡 2번(1938), 현을 위한 디베르티멘토(1939) 등 그의 대표작들이 대거 탄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